"당신이 이겼습니다" 그림으로 쓴 판결문… 법원이 지적장애인에게 보낸 '쉬운 판결문'

판결문을 받아 든 사람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문장이 "주문. 피고가 원고에 대하여 한 처분을 취소한다"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 이겼습니다"라면 어떨까. 이번 주 한 법원이 실제로 그렇게 썼다. 받는 사람이 지적장애가 있는 원고였기 때문이다.
판결문에 등장한 낯선 한 문장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6월 25일, 장애인 등록을 거부당한 한 지적장애인 원고에게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 평소와 전혀 다른 형식의 판결문을 함께 건넸다. 보통의 판결문이라면 "피고가 원고에 대하여 한 장애정도 미해당 결정 처분을 취소한다"는 식의 법률 문장이 들어갈 자리에, 이번에는 이렇게 적혔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법원은 구청의 결정을 취소합니다." "당신은 지적장애인으로 등록할 수 있습니다."
판결의 효력까지 한 문장으로 풀어 쓴 셈이다. 어려운 한자어와 긴 수식 대신, 결과가 무엇이고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당사자가 바로 알 수 있게 했다.
'이지리드'라는 방식
이런 형식을 '이지리드(easy-read)'라고 부른다. 복잡한 정보를 짧은 문장, 쉬운 단어, 그림을 곁들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국제적인 정보 전달 방식이다. 영국·호주 등에서는 공공기관 안내문이나 의료 동의서에 이미 널리 쓰이고 있다.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이 있는 사람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스스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게 핵심이다.
법원 문서는 그동안 이지리드와 가장 거리가 먼 글이었다. 판결문은 항소·상고의 근거가 되는 법적 문서라 정확성을 위해 표현이 빽빽하고 딱딱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확성을 유지하면서도, 정작 그 판결의 당사자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순을 이번에 처음으로 깬 것이다.
양천구청을 상대로 한 소송
사건 자체는 흔한 행정소송이었다. 원고는 지적장애인으로 장애인 등록을 신청했지만 "장애 정도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양천구청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처분을 취소하고, 장애인 등록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끝났다면 평범한 승소 판결이었겠지만, 재판부는 "이 판결의 내용을 정작 원고 본인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졌다. 그 답이 별도의 쉬운 판결문이었다.
AI가 그린 판결문 삽화
쉬운 판결문에는 글뿐 아니라 그림도 들어갔다. 상황을 설명하는 삽화는 대규모언어모델(LLM) 기반 AI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이 직접 일러스트레이터를 두기 어려운 현실에서, 생성형 AI가 "이해하기 쉬운 판결문"을 보조하는 도구로 쓰인 셈이다.
다만 이 부분은 조심스럽게 볼 필요가 있다. AI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본문 이해를 돕는 보조 장치이고, 법적 효력을 갖는 정본은 기존 형식의 판결문이다. 쉬운 판결문은 그 위에 얹은 '해설판'에 가깝다고 이해하면 된다.
왜 지금 처음 나왔나
제도적 배경이 있다. 올해 시행된 대법원의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법 지원' 관련 규칙에 따라, 법원이 장애인·고령자 등 정보 접근에 어려움을 겪는 당사자를 더 적극적으로 배려하도록 한 흐름의 첫 결과물이다. 사법정책연구원이 마련한 '이해하기 쉬운 판결문 작성' 가이드라인도 토대가 됐다.
법원 문턱이 높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 경험이다. 자기 사건의 결과조차 통역 없이는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판결문의 첫 문장이 무엇이냐는 작지 않은 문제다. "당신이 이겼습니다"라는 다섯 글자가 화제가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남은 과제
물론 모든 판결을 이지리드로 쓸 수는 없다. 사건마다 쟁점이 다르고, 쉬운 표현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법적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질 위험도 있다. 그래서 당분간은 장애인·아동 등 배려가 특별히 필요한 사건에 한해, 정식 판결문에 더해 보조 형태로 제공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사례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지, 표준 절차로 자리 잡을지는 앞으로의 운용에 달렸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쉬운 판결문'이라는 검색어로 이 글을 찾아왔다면, 비슷한 배려가 필요한 가족이나 지인의 행정·법률 문제를 떠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장애인 등록이나 행정처분에 이의가 있다면, 거주지 관할 행정복지센터나 법률구조공단(국번 없이 132)에 먼저 상담을 요청해 절차부터 확인해 두자.
출처: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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